한국인의 호/자/인명록

   한국인의 호/자/인명록
                     
    한국인의 號/人名 자료

    편집-고은 지성룡

     고연출판

한국인의 구한말 까지의 인물 6000인의 호와 자 이름을 가나다 순으로 집성한 號백과사전. 총 671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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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에관한 상식 호 짓는 방법

호에 관하여 
 호는 한국과 중국에서 본명이나 자(字) 외에 허물없이 부를 수 있도록 복명(復名)이나 실명을 경피(輕避)하는 습속에 의거해 만들어 써 왔다. 흔히 호의 시작을 요순시대로 거스르기도 한다. 

요임금을 흔히 서경에 보면 방훈(芳薰)이라 했고 순임금을 중화(重華)라 부르는데 이는 이름이기보다는 아마도 최초의 호(號)로 보는 편일 옳을 것이다. 

그러나 본격적으로 호가 사용되기 시작 한 것은 당(唐)나라 때부터이고 송(宋)대에는 더욱 보편화 되었으며 우리나라 에서는 삼국시대 때부터 사용되기 시작 하였으며 조선시대에 이르러서는 일반·사대부·학자들에 이르기까지 보편화되었다.  

호는 일반적으로 스승이나 선배가 지어주는 것이 통례이며, 당호나 서재는 자기 스스로 지어 쓰기도 하였다.
 
호는 이름과 달리 좋은 문장이나, 자연물, 사는 곳, 산 이름, 사람의 성격 등을 고려해서 짓는다. 

 당나라의 대표적인 시인인 이태백(李太白)이나 송나라의 문장가 소동파(蘇東坡)는 그의 본 이름인 이백(李白)이나 소식(蘇軾)보다도 호가 널리 알려진 경우이다. 

호의 사용이 정착한 것은 조선시대에 이르러 학자들 간에 학문적 교류와 편지 교환이 일반화되면서 본 이름보다는 호나 자를 사용하는 것이 예의를 차리는 것으로 인식되었기 때문이었다. 

호 짓는 법에 관하여는 고려시대의 이규보가 지은 백운거사집에 “거처하는 자에 따라 호를 짓기도 하고 혹은 간직한 것을 근거로 하거나 또는  얻은 바의 실상을 근거로 짓는 사람도 있다”고 기록한다.

단재(丹齋) 신채호는 말하기를 “자신이 목표로 삼아 도달한 지경이나 지향하고자 하는 목표와 의지에 따라서 호를 짓는다” 고 기록하고 있다.

이로보면 대략 호 짓는 규정은 사주(四柱)에 의해서가 아니라 
1,소처이호(所處以號-생활하고 있거나 인연이 있는 처소를) 
2,소지이호(所志以號-이루어진 뜻이나 이루고고자하는 뜻). 
3,소우이호(所遇以號-처한 환경이나 여건) 
4,소축이호(所蓄以號-간직하고 있는 것이나 그중 특히 좋아하는 것으로)로 호를 지음을 알 수 있다.

호는 스스로 짓기도 허고(自號라 부름) 스승이나 부모 등 남이 지어주는 경우도 있다.

  따라서 거처하는 곳이 바뀜에 따라 호가 달리 사용되기도 했으며, 좋아하는 물건이 여럿인 경우 호는 늘어나게 마련이었다. 호는 집안에서 사용한다는 의미의 당호(堂號)와 시 ·서 ·화 등에 쓰는 아호(雅號)로 나누어지기도 했으나, 양자 간에는 뚜렷한 구별이 없이 혼용되었다. 

고려 후기의 대표적인 문신 이규보(李奎輔)의 경우는 초기에는 시 ·술 ·거문고 세 가지를 좋아하여 삼혹호선생(三酷好先生)이라 호하였다가 나중에는 구름에 묻혀 있는 자신의 처지를 좋아하여 백운거사(白雲居士)로 호를 바꾸기도 했다. 

조선 중기 이후로 호의 사용은 더욱 확대되었으며 서경덕(徐敬德)의 화담(花潭)과 같이 주로 자신이 학문을 배우고 가르친 곳을 호로 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런가 하면 자신의 거처지나 일생의 고사에 얽힌 호도 있는데 이황의 퇴계(退溪), 이이(李珥)의 율곡(栗谷)이 좋은 예다. 
이들 문인들을 지칭할 때도 퇴계문인 ·화담문인 ·율곡문인 등으로 호를 사용하였다. 
성리학자 조식(曺植)의 호 남명(南冥)은《장자(莊子)》에 나오는 용어로서 노장사상에 관심을 가진 자신의 사상적 입장을 표현하였다. 

호가 가장 많았던 사람은 조선 후기의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로서, 알려진 것만 해도 약 500여 개가 된다. 

김정희가 많은 호를 사용한 것은 시 ·서 ·화에 두루 능하였던 예술인이었기 때문인 것으로 생각되는데, 그의 대표적인 호는 추사 ·완당(阮堂) ·예당(禮堂) ·시암(시庵) ·선객(仙客) ·불노(佛奴) ·방외도인(方外道人) 등으로서 유·불·도 삼교사상을 망라하는 호를 사용한 것이 주목된다. 

1945년에 편찬된《대동명가호보(大東名家號譜)》나「東賢號錄」에는 호를 유형별로 분석하고 있는데
 堂 齊 菴 亭 軒 窩 窓 樓 閣 門 村 里 園 圃 塢 田 庵 室 등으로 끝나는 호는 대개 所處以號라고 보면 되고
 隱 翁 叟 子 仙 居士 處士 散人 山 峰 江 岳 皐 涯  坡 阜 岩 石 谷 洞 州 海 江 汀 浦 灘 洲  川 溪 澗 泉 淵 潭 塘 沙 沼 등이 있는데 이는 所遇以號로 보면 된다. 
그 외에 지신의 의지나 목표 지향(志向) 하는 바 등은 所志以號일텐데 이는 정해진 글자가 없다. 흔히 잡호(雜號)가 이에 해당하는데 여기에는 방위(方位-陽 陰 東 南 西 北 下 左 口 裏 등)호, 초목(草木-松 竹 梅 蘭 菊 梧 槐 蓮 桂 樹 焦 荷 蘿 莎 林 枝 芚등)호, 천문(天文-天 日 暄 影 雲 霞 雪 色 翠 蒼 虛 寒 등)호, 기용(器用-玉 琴 丸 瓢 壺 屛 舟 篷 笻 衣 纓 弦 錁 冶 印)호 등을 들 수 있다.
  
내용별로는 자신이 거주했던 곳이나 인연이 있었던 곳을 따서 지은 경우와, 인생관이나 수양 목표를 한 경우, 완호물(玩好物)을 대상으로 한 경우가 많았다. 일제강점기에서는 민족주의를 지향하는 주시경(周時經)의 ‘한힌샘’, 최현배(崔鉉培)의 ‘외솔’ 등의 호가 나타났으며, 순수문학을 지향하던 김정식(金廷湜)의 소월(素月), 박영종(朴泳鍾)의 목월(木月) 등의 호도 우리에게 이름보다는 친숙하게 다가온다. 이 외에 이상백(李相佰)의 호 상백(想白)과 시조시인 이호우(李鎬雨)의 호 이호우(爾豪愚)는 이름과 호의 음을 같게 한 경우이다.                              
 부언한다면 호는 자신을 낮추는 것이므로 격상(格上)의 호는 짓지 않고 겸양의 호를 쓰는 것이 좋다.  
예를 들어 보면, 중국의 大癡(나대경)나 한국의 小癡(허유)는 좋은 예이고 간혹 지향적, 소호(所好)적인 호를 짓다보면 꼭 그렇지는 않는 경우도 많지만 대체적으로는 자신의 한미한 처소를 당호로 쓰는가 하면 욕심 없는 선비정신을 누추한 처소에 걸맞게 쓰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수 많은 호중에 高자를 쓰는 예는 아주 드물다.
자신이 호를 이름을 대신하여 쓴다고 하면 겸양의 미를 나타내는 것이지만 남이 불러 줄 때는 이름을 부르기 보다는 호를 부르므로 격상의 의미를 주는 의미가 있다. 그러므로 통성명시에는 자신의 호를 칭하여 자호(自號)함이 좋지 않으므로  반듯이 이름으로 자신을 소개함이 좋을 것이다.  그러나 남의 호를 불러준다는 것은 상대방을 존(尊)하여 부르는 의미이므로 윗분이나 아랫사람이나 널리 이용하여 불러주는 것이 좋다고 본다. 
 
 堂號(당호)에 관하여...
'당호(堂號)'는 '옥호(屋號)' 재호(齋號) 실호(室號)이라고도 하나 당호라고 보통 불리운다. 
 당호는 보통 자신의 호와는 달리 사는 집 또는 공부하는 곳 등을 말한다. 
당호의 호칭으로는 당(堂), 산방(山房), 재(齋), 서옥(書屋), 헌(軒), 정(亭), 노(盧), 각(閣), 누(樓), 실(室), 와(窩), 암(庵) 창(窓), 문(門)을 써서 아호 다음에 붙여 쓰기도 하고 그 자체 거처의 명을 붙여 자호하여 부르기도 한다. 
 호를 지음에는 잡호(雜號-형식에 구애 없이 네 원칙에 근거하여 보통 자신이 지음)를 제외하고는 대개 아호(雅號-남의 호를 높여서 부르는 말) 밑에다 山人, 散人, 道人, 主人, 老人, 翁, 居士, 逸士, 退仕, 布衣 등을 쓰는데 이른바 자신의 처지를 형용화한 호를 쓰기도 하는데 그 의미는 아래와 같다.
山人-속세를 떠나 산에 사는 사람을 뜻한다. 원래 정한 '호' 이외에 山人 두 자를 합쳐서 '호'로 쓰 기도 한다. 
散人-어느 한 곳에 구애되지 않고 자유롭게 삶을 사는 사람을 뜻한다. 
 

道人-학문이나 예술의 분야에 정진하고 있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主人-대개 '당호(堂號)' 또는 산(山) 지명이름 밑에 붙여서 쓰는 것으로 그 집, 또는 그 산천의 주인이란 뜻이다.  
老人-늙은이란 뜻으로 '老人'은 호 밑에 쓰고 '노'는 호 밑에 혹은 위에 쓰기도 한다. 
翁-老人과 같은 뜻으로 늙은이란 뜻이다. '호'나 나이 밑에 쓴다. 
居士, 逸士, 退仕-속세를 떠나 조용한 초야나 심산에 들어 학문을 닦는 선비를 뜻한다. 
布衣-속세를 떠나 초야에 살면서 야인이란 뜻이다. 
부언하지만 호는 사주나 오행의 음양철학으로 짓는 것이 아님을 명심해야 한다.

일부 내용 소개

號 /人名 /字 順

稼谷 심 기 沈機 자 伯衡. 호 稼谷
佳谷 이 기 李紀 자 汝綱. 호 佳谷
稼谷 조정강 趙正綱 자 紀之. 호 稼谷․ 南麓
嘉橘 김건순 金健淳 (1776-1801) 자 正學. 호 嘉橘
嘉藍 이병기 李秉岐 1891(고종 28)∼1968. 국문학자·시조시인. 호 가람(嘉藍). 
稼堂 엄석정 嚴錫鼎 (1801-1875) 자 文友. 호 稼堂
嘉陵 남헌교 南獻敎 자 景曾. 호 嘉陵
嘉林 구정래 具鼎來 1634(인조 12)∼1698(숙종 24). 조선 후기의 학자. 자 내길(來吉), 호 연포(蓮浦). 가림(嘉林) 
嘉林 유장세 柳長世 (1621-1683) 자 長卿. 호 嘉林
茄山 유덕장 柳德章 (1694-1774) 자 子固․ 聖攸. 호 岫雲․ 茄山
可山 이구환 李九煥 호 可山
可石 송득용 宋得用 1864(고종 1)∼1935. 유학자. 자 공필(公必). 호 가석(可石).
可笑堂 백광호 白光瑚 1639(인조 17)∼1722(경종 2). 조선 후기의 학자. 자 여기(汝器). 호 가소당(可笑堂). 
可室 주명상 朱明相 (1839-1910) 자 子明. 호 可室
可菴 최제묵 崔濟黙 (1797-1847) 자 可言. 호 可菴
可用 이 노 李潞 자 季路. 호 可用
稼雲 서유본 徐有本 (?-1795) 호 左蘇山人․ 稼雲․ 農丈
稼隱 권 용 權瑢 자 稚圭. 호 稼隱
稼隱 성언근 成彦根 1740(영조 16)∼1818(순조 18). 조선 후기의 학자. 자 숙회(叔晦), 호 가은(稼隱).
嘉隱 심대부 沈大孚 (1586-1657) 자 信叔. 호 嘉隱․ 泛齋
可隱 이 기 李箕 (1792-1858)자 寅粲. 호 可隱
歌隱 정민하 鄭敏河 자 達夫. 호 簫隱․ 歌隱
稼隱 조정견 趙庭堅 자 公直. 호 稼隱
街人 김병로 金炳魯 1887(고종 24)∼1964. 법조인·정치가. 호 가인(街人)
佳齋 전동흘 全東屹 자 士卓. 호 佳齋

人名 /字 / 號 順
 ㄱ
각민 覺敏 (1596-1659)선승, 호 松坡
각성 覺性 (1575-1660)선승, 자 澄圓. 호 碧巖
각안 覺岸 (1820-1896)선승, 자 幻如. 호 梵海. 두륜산인구계(頭輪山人九階)
각운 覺雲  선승, 호 龜谷. 
각훈 覺訓  선승, 호 高陽醉髡
감경인 甘景仁 (1569-1648) 자 汝一, 호 觀述亭
강 겸 姜謙 1) (?~1504) 자 謙之 
           2) (1654-1703) 자 士益. 호 南齋
강경서 姜景叙 (1443-1510) 자 子文. 호 草堂
강경선 姜景善 자 元景. 호 克齋
강경선 姜敬善 자 雲瑞
강곽 姜漷 호 俟翁
강귀손 姜龜孫 (1450~1505) 자 用休
강규 姜逵 자 仲鴻. 호 井田
강규환 姜奎煥 (1697-1731) 자 長文. 호 存齋
강극성 姜克誠 (1526-1576) 자 伯實. 호 保晩堂․ 醉竹
강기덕 姜基德 (1886~?) 31운동 48인중 한 사람. 자 春谷 호 德齋
강난형 姜蘭馨 (1813~?) 자 芳叔
강노 姜㳣 (1809-1887) 자 期仲. 호 豹雲․ 貞隱
강담 姜紞 호 蘭谷
강대수 姜大遂 (1591-1658) 자 勉哉 ․ 學顔. 호 春磵․ 寒沙晩隱
강대적 姜大適 조선중기 의병장. 자 學仲. 호 九洲
강대주 강대주 (1880~1909) 한말 의병장. 자 達周
강대호 姜大虎 자 藻卿. 호 河陰
강덕룡 姜德龍 (?-1627) 무신. 자 汝中
강도흥 姜道興 자 士賢
강두환 姜斗煥 자 七瑞. 호 起軒
강맹경 姜孟卿 (1410-1461) 자 子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