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어색인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논어 색인
原文 附
<고은 지성용의 이문서우회 
1년 강의 원문> 圖書出版-古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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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序)
공자, 그는 어떤 인물인가? 
공자는 누구이기에 2500여 년 간 중국은 물론 한국 일본까지 동양의 사상을 지배했는가?
공자는 춘추시대 노나라의 미천한 집안에서 태어났다. 귀족들의 전제시대에 공자 같은 미천한 신분의 출생의 악재를 딛고 당대는 물론 후세에 이르도록 만세사표(萬世師表)로 추앙받는 일이 어떻게 가능했을까?
실은 이 점이 일종의 미스테리라 해도 과언은 아닌데 이는 어디까지나 우리가 아무리 춘추시기 말경의 정치상황을 막 가는 세기말적 말세 풍조로 치부해도, 온전히 이해할 수 없는 당대의 인문적 바탕이 사회적으로 정치적으로 두텁게 형성되었기 때문이다. 

 공자는 창평(昌平) 추읍(雛邑) 지금의 산동성 곡부(曲阜)시에서 주나라 영왕(靈王) 21년인 b.c 551년에 태어나 노나라 애공(哀公)22년인 b,c 479년에 세상을 떠났다. 우리나이로 치면 73세에 해당한다. 
공자의 출신 배경부터가 예상치 않게 치부(恥部)적인데가 많아 드러내 놓고 공개하기조차 꺼려할 만큼 터부시 하는 면이 있지만 공자 자신은 자신의 성장 배경에 대하여 솔직한 표현을 한 곳이 있다. 논어 자한편 6장을 보면
“大宰問於子貢曰 夫子聖者與 何其多能也. 子貢曰 固天縱之將聖 又多能也. 子聞之曰大宰知我乎 吾少也賤故多能鄙事 君子多乎哉 不多也. 牢曰 子云吾不試故藝.:라 했다.즉 “태재가 자공에게 물었다. ‘공자는 성인이십니까? 어찌 그리도 아는 것이 많습니까?’ 하자 자공이 대답했다. ‘진실로 하늘이 내리신 성인이시고 또 할 줄 아는 것이 많으십니다.’하자 공자가 그 이야기를 듣고 ‘태재가 나를 바로 아는구나. 나는 어려서 미천하였기에 자질구레한 비천한 일까지 두루 하게 되었다. 군자는 할 줄 아는 것이 많겠느냐? 많지 않느니라.’ 제자인 뇌(牢)가 말했다. ‘선생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나는 세상에 등용되지 못하였기 때문에 많은 재능을 갖게 되었다‘고 하였다”. 
이런 기록이 숨김없이 기록된 배경은 공자의 인문주의적인 사상을 이해하는 도움이 될 것이다. 
공자는 평소의 지론인 인의로 천하를 경영하려는 꿈이 어긋나자, 말년에 고향으로 돌아와 제자들 교육에 전념하는데 논어에 그의 사상과 풍모가 잘 그려져 있다. 
그는 인력으로 어찌 해 볼 수 없는 거대한 시세의 흐름을 하나의 사조(思潮)로 인식하여 좌절하여 그저 한숨만 쉬지는 않았다. 
 공자는 항상 "지금 이 순간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가?"를 반문했으며, 바로 이 순간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깨달아 아는 일이 곧 지명(知命)’이다 라고 하였다. 
그래서 공자는 ‘소명을 모르면 군자가 될 수 없다’고 하였으며 많은 공부를 하여 ‘하(夏)의 예제(禮制)를 내가 직접 설명할 수 있지만, 기(杞)나라(하나라 후손국)에 충분한 증거가 남아있지 않고, 은(殷)의 예제(禮制)를 내가 직접 설명할 수 있지만, 송(宋)나라(은나라 후손국)에 충분한 증거가 남아있지 않다. 만약 문헌만 충분히 있다면 나는 그것을 입증할 수 있을 것이다’라고 할 정도의 자부심을 가질 수 있었다. 
공자의 일거수 면모를 들여 다 보자.
그는 향당(鄕黨)에서는 마치 말을 못하는 사람인양 공손했으며, 종묘(宗廟)나 조정에서는 분명한 말을 하되 어디까지나 삼사 했다. 조정에서 상대부(上大夫)들과 이야기할 때는 중용(中庸)을 지켜 좌우로 치우치지 않았으며, 하대부(下大夫)들과 이야기할 때는 늘 화기애애(和氣靄靄)하였다고 한다. 
공문(公門)을 들어갈 때는 몸을 움츠렸으며, 빠른 걸음으로 나아갈 때도 새가 날개를 펴 나는 듯 단아(端雅)한 모습을 하였다. 

 임금(公)이 불러 외빈 접대하기를 맡기면 낯빛을 장중(莊重)히 했고, 재직 시에는 임금이 명(命)으로 부르면 수레가 채비되기를 기다리지 않고 즉시 달려갔다. 
 그는 또한 자리가 바르지 않으면 앉지도 않았으며, 상(喪)을 당한 사람 옆에서 식사할 때는 과식한 적이 없었다.
 상가에서 곡(哭)을 한 그 날에는 노래를 부르지 않았으며 또한 상복 입은 사람이나 소경을 길에서 만나면, 비록 어린아이이더라도 낯빛을 고쳤다고 한다.

그의 학문적 추구에 격벽(隔壁)과 차별이 없음의 인식은 ‘삼인행필유아사(三人行必有我師)’ 즉, ‘셋이서 동행할 때도 그 중에는 나의 스승이 있다’ 할 정도로 학문에 대한 배움의 열정과 수신의 노력을 몸소 제자들에게 보여준 분이다. 이와 같이 스스로 하늘 아래 부끄러움이 없기를 스스로 찾아 행하는 삶을 보임으로써 제자와 후세 사람들에게 가르침을 남긴 사람이 곧 공자였으니 그의 언행을 모은 내용이 곧 『논어』이다.

『논어』에는 “博學而篤志 切問而近思 仁在其中矣”-<子張6>라 하여 “널리 배워 뜻을 돈독하게 하며, 절실하게 질문 한다” 는 말이 있다. 이 때 질문과 생각은 학문의 ‘문’에 대응된다. 즉 『논어』는 어떤 지식이든 항상 의문과 의심을 가지고 비판적으로 접근할 때에만 참된 나의 지식이 될 수 있다고 말한다. 
 『논어』에서 학(學)이라는 글자를 중심으로 논해지는 사상은 바로 오늘날 학문의 의미를 충실하게 담고 있다.

공자는 말하기를 “聞道 夕死可矣”-<里仁8>“아침에 도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고 했다. 이 말은 마치 어떤 절대적(絶對的)인 도(道)를 이르는 듯 한 분위기를 담고 있으나, 
 공자가 말하는 도(道)는 노장학에서 말하는 허공을 치는 듯한 도를 말함이 아니라 정치 경제 사회 전반에 걸친 실사구시적  올바른 학문에 대한 다짐과 자세를 언급한 것으로 보인다. 공자는 "나는 열다섯 살에 학문에 뜻을 두었다(志於學)"고 말하였다. 학문이란 세상의 도(道)에 대해 배우는 것이며 도는 배운 바를 실천하는 길이다. 

『논어』의 중요한 사상 중 하나가 정명론(正名論)인데, 공자는 “觚不觚 觚哉觚哉”-<雍也23> “모난 술잔(名)이 모나지 않으면, 그것이 모난 술잔인가! 모난 술잔인가!”라고 말하였다. 공자의 정명 해석에서 정명의 명(名)은 군군신신부부자자(君君臣臣父父子子), 즉 군신부자(君臣父子)간의 신분에서 나타나는 질서를 지칭하는 이름에 한정되었으나 그러나 결국 명(名)은 모든 개념(槪念)을 포함하는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신하가 신하답게 되기 위해서는” ‘충(忠)’ 등이 무엇인지 알아야 하고, “자식이 자식답게 되기 위해서는” ‘효(孝)’가 무엇인지 알아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공자는 『논어』에서 군군(君君), 신신(臣臣), 부부(父父), 자자(子子)뿐 아니라, 효(孝), 인(仁), 의(義), 예(禮) 염치(廉恥)에 까지도 논하고 있다. 
즉 모든 명(名-개념 또는 명분)에는 그 명분(名分)에 어울리는 ‘실(實)’이 갖추어져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논어에는 군자(君子)대한 개념에 많은 분석을 할애하고 있다. 
공자는 말하기를 “바탕(質-진실한 감정)이 형식(文-예의범절)을 압도하면 거칠고, 형식이 바탕을 압도하면 문채만 난다. 형식과 바탕을 잘 어울러야(文質彬彬) 비로소 군자다”라고 하였다. 
 즉 진실된 마음(質)을 바탕으로 예(文)를 행할 수 있어야 군자라는 말이다. 
 또 논어에서 군자는 대체로 소인과 대비되어 논해지고 있는데 군자와 소인은 우선 다음 두 맥락에서 나누어진다. 
첫째, 정치적 사회적 계급적 의미에서 군자는 통치자(귀인)이고 소인은 피통치자(천인)이다. 
둘째, 도덕적인 의미에서 군자는 국가·사회의 이익에 우선 관심을 갖는, 도덕적인 인물을 지칭하고, 소인은 자기 자신의 이익에만 관심 갖는, 부도덕한 사람을 지칭한다. 공자는 “군자는 의(義)에 밝고, 소인은 이(利)에 밝다”고 하였다. 
이 말을 정명론으로 이해하면, ‘어떤 개인의 명목상의 위치가 어떻든 의리를 추구하면 군자이고 잇속에 탐닉하면 소인이다’는 뜻이 된다. 
군자에 대한 공자의 논의의 특징은, 군자가 우선 그에 어울리는 도덕적 품성을 갖추어야 비로소 정치적 사회적으로 진정한 군자가 된다는 주장에 있다.
이런 논리에서 보면 군자와 소인의 대비가 결코 신분구별의 전근재적 질서를 강조하는 말이 아님도 알아야 할 것이다.

또한 중요한 것으로 공자는 군자의 덕성으로 인(仁)을 논했다. 인은 효(孝), 충(忠), 지혜(智), 용기(勇), 예(禮)를, 공(恭) 등 모든 덕목을 포괄하는 완전한 덕(德)을 일컬으는 말이다. 
사람들이 예에 따라 행하지 않는 까닭을 모두가 그들 자신의 욕구를 만족시키려고 자신의 욕구에 따라 행하기 때문이라고 여겼는데 예를 실천(復禮) 하려면 반드시 극기(克己)해야 한다고 말했다. 
‘극(克)’이란 ‘싸워 이긴다’는 뜻이므로, 극기(克己)는 예(禮)로써 자기의 욕구와 싸워 이기려는 것으로서, 극기할 수 있다면 자연히 예를 실천하게 된다. 
인(仁)이란 우리 마음이 진실하면서도 예에 맞는 발로(發露)이니, 자기 마음을 미루어 남을 헤아리는 것, 즉 추기급인(推己及人)을 말한다. “자기 마음을 미루어 남을 헤아리고”, “자기가 싫은 것은 남에게 시키지 않는 것”이 인을 실천하는 방법이다 라고 말했으니 곧 감정이입의 최대 본인 셈이다. 인을 실천하는 방법이 이처럼 말로 간단하지만 실천이 그리 쉽지 않았으니, 그래서 공자는 “인이 멀리 있다고 여기는가? 내가 인을 바라기만 하면 인은 바로 곁에 있다”고 말하므로 인의 생활화를 강조하였던 것이다.

이제 미역(微譯)이긴 하지만 그동안 여러 해 걸쳐 만지작거리다 끝내지 못한 논어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논어”를 드디어 퇴고하게 되니 마음이 후련하다. 아울러 이용의 편리를 도하기위하여 색인을 따로 빼어 보았다. 

가나다순 논어색인  

可欺也 不可罔也. 雍也-24
可得而聞也 夫子之言性與天道 不可得而聞也. 公冶-12
可使南面. 雍也-01   
可使爲之宰也 不知其仁也. 公冶 -07
可使有勇 且知方也 夫子哂之. 先進-25 
可使足民. 先進-25 
可使從政也 曰 求也藝 於從政乎何有. 雍也-06 
可使從政也 子曰 由也果 於從政何有. 雍也-06 
可使從政也與 曰 賜也達 於從政何有. 雍也-06 
可使治其賦也 不知其仁也. 公冶-07 
可逝也 不可陷也 可欺也 不可罔也. 雍也-24
加我數年 五十以學易 可以無大過矣. 述而-16 
可也簡. 雍也-01  
可與共學 未可與適道 可與適道 未可與立 可與立 未可與權. 子罕-29 
可與立 未可與權. 子罕-29
可與事君也與哉 其未得之也 患得之 旣得之 患失之. 陽貨-15 
可與言而不與之言 失人. 衛靈-07  
可與適道 未可與立 可與立 未可與權. 子罕-29
可謂具臣矣. 先進-23  
可謂大臣與. 先進-23 
可謂明也已矣. 顔淵-06 
可謂士矣 朋友 切切偲偲 兄弟怡怡. 子路-28 
可謂士矣. 子路-20 
可謂遠也已矣. 顔淵-06  
可謂仁矣. 雍也-20
可謂仁之方也已. 雍也-28
可謂仁乎. 雍也-28  
可謂知矣. 雍也-20
可謂知乎 曰 不可. 陽貨-01 
可謂好學也已. 學而-14 
可謂好學也已矣. 子張-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