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첩금낭해설서

  • 1비첩금낭 해석서 별권 4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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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집자형태의 묵장보감이나 개인 서체로써의 명언명구집은 흔히 접할 수 있었으나 원문, 원적 형태의 碑帖錦囊(비첩금낭)은 출간 된 적이 없었다.
비첩을 임서하다 보면 문득 문득 깜짝 놀랄 명구들이 눈에 띈다.
자자의 필법과 형태에 신경 쓰다 보면 명문장 명 구절들을 간과하기 일쑤인데 이런 명문장들을 오려 엽앙(葉盎)에 담기 여러 해를 지나다 보니 이제 대표적인 비갈의 금낭(錦囊)이 되었다.
서예의 역사는 碑碣(비갈)의 역사인 만큼 碑(비)의 차지하는 비중이 크다. 그러나 한자가 언제부터 만들어졌는지 알 수 없듯이 그것을 표현하는 서체의 기원도 정확히 고증할 수는 없다.
 史記(사기)에 의하면 上古(상고)시대에 伏羲(복희)씨의 八卦(팔괘)나 皇帝(황제)시대의 蒼頡(창힐, 기원전 2600년경)이 만들었다는 鳥迹(조적)문자, 시기를 알 수 없는 結繩(결승)문자 등은 上考(상고)할 수 없는 인류 초기시대의 전설상의 문자로, 검증할 수 없는 반면, 銀(은)왕조(기원전1100년)의 청동기 시대에 해당하는 胛骨文(갑골문)은, 출토 되자마자 최초 최고의 문자로 증명되었다. 대부분 황하 유역에서 발견되어 황하 문화를 일면 증명하기도 하는데 문장의 대부분 내용이 卜辭(복사), 즉 주술(呪術), 길흉화복을 점친 내용을 獸骨(수골)에 새겨 넣은 것 들이다.
 그러다 周(주)대에 이르러 주조된 청동기에 새기거나, 주물로 부어 표현한 초기 전문 형태의 고증이 수 없이 발견되어 중국의 문자문화의 화려함에 세상을 놀라게 했고, 漢(한)대에 이르러는 磨崖碑(마애비), 묘의 碑碣(비갈)을 통해 한층 발전된 隸書(예서)형태의 고증을 수도 없이 표현했다.
서예의 법서로서의 원류는 秦, 漢(진, 한)대의 비갈에 표현된 전, 예서, 한때 중원의 북쪽을 다스리며 강인한 서체를 풍미한 北魏(북위)해서, 脩唐(수당)을 거친 완성미를 자랑하는 수당해서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중국서안의 碑林(비림), 곡부의 孔廟(공묘)는 비 문화의 보고이다. 
 본 자료는 시대순의 서체를 엮었으므로 응용할 문구는 물론 이거니와 대체적으로 서예의 변천과 서체미를 한눈에 보면서 느끼게 하는 데 도움이 되리라 믿는다. 그러나 갑골문은 채취할 만한 문장이 없어서 부득이 빠질 수밖에 없었으며 진전문도 당대의 자료가 부족하여 많이 실지 못함이 아쉽다 하겠다.
방대한 비문을 통해서 우리는 무엇을 얻고자 하는가.
사실 비문은 그 자체의 가치가 극히 일부를 제외하고는 가족이나 문벌,문중에 한하므로 특별한 경우 외에는 대중에게 주는 가치가 적다. 그것이 호태왕비나 진흥왕순수비등의  국가적 차원의 대상이 아니고는 한 문중이나 개인의 이력을 밝히는데 족 할 것이다.
여기 230여개에 달하는 비문 중 호태왕비를 제하고는 대부분 중국 당대이전의 비갈(碑碣)들로서 일부는 국가적 그리고 대부분은 개인의 비문이나 묘지명들이다. 
시중엔 서가들에게 잘 알려진 몇몇 비문들의 자형을 채취하여 시문이나 고사성어로, 또는 억지 맞춤식의 문장들이 범람하고 있으나 비문 자체의 명구를 채취하여 집성한 책은 없는 형편이다. 본 책은 235 개의 비문 및 척독을 해부하여 그중 비첩 자체가 주는 명구를 채취한 16,000 여개의 명언들이다. 
 위(魏)대에는 개인의 비석 건립을 엄격히 법으로 금한 적이 있었다. 왜냐하면 개인의 명예로움에 지나치게 못 미치는 미사여구들이 천편일률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 내용이 개인의 공을 지나치게 추겨 올린 거짓말이라 할지라도 미사여구 자체는 우리에게 주는 감동이 다르다. 
본 책의 235개 비첩에 수록된 8258 여개의 어제(語題)는 내용은 단순한 짜깁기 형태의 묵장보감이 아닌 원문, 원적 형태의 碑帖錦囊(비첩금낭)이자 서가(書家)들의 盎葉記(앙엽기)가 되리라 보며 주옥같은 문장도 감상하면서 眞跡(진적)의 書體美(서체미)를 임서하여 공히 작품에 응용하시기를 기대하여 마지않는 바이다. 
 상고(上古)의 갑골(胛骨)문은 문장으로써의 자료가 부족하여 채록지 못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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