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사기람 민체

구한말 윤용구 대신이 쓴 중국정사 사대부 글씨의 정체를 알 수있는 민체


정사긔람, 이미 궁체백선 10권을 선정할 때 사서,소설류 100종을 선택하여 궁체의 특징을 발표한 바 있었는데 그때 필자는 정사긔람에 유념했다. 본서 정사긔람은 총 80권 80책의 방대한 분량으로 중국 상고에서부터 명나라 말까지의 정사를 한글로 정리하여 구한말의 충신이자 서화가인 윤용구 선생이 직접 필사한 귀중한 자료다. 서체의 아름다움은 말 할 것도 없으려니와 그 활달한 기상은 얌전한 궁녀들의 고식적인 서체에 젖었던 필자에게는 상당한 충격의 서체였기 때문에 이를 궁구하고 아끼기를 마지 아니 하다가 1980년대 중반 필자의 서실 후학들을 위하여 교재로 삼으려하여 우선 제 일 권을 해석을 하여 사용하여 오던 중 필자의 숙작(宿作)인 비첩금낭 8권이 완간됨을 계기로 세상에 내 놓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그래서 궁체백선의 목록에서 의도적으로 넣지 않았는데 이유는 본서 자료만큼은 일부 부분 자료로 허투루 소개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제 진정한 사대부체의 진수를 이해할 수 있게 되리라 생각하며  나아가 민체의 징검다리 구실이 가능한 본 자료의 유려하고 막힘없는 힘찬 남성적 기상을 느낄 수 있을 것으로 여겨진다. 이제 궁체의 진일보한 단계를 십분 느끼고 더불어 자세한 해설과 주석을 통하여 고문의 이해도 겸하여 보길 권하는 바이다.
필서자이자 찬자인 윤용구 선생의 약력을 기재한다.
윤용구는 구한말의 정치가이자 서화가로 1853년(철종 4)에 태어나 1939년에 죽었다.
본관은 해평(海平). 자는 주빈(周賓), 호는 석촌(石村)·해관(海觀)·수간(睡幹)·장위산인(獐位山人). 남녕위 의선(宜善)의 아들이다. 1871년(고종 8) 직장(直長)으로서 문과에 등제하여 벼슬이 예조·이조판서에 이르렀다.
1895년 을미사변 이후로 법부·탁지부·내무부 등 대신에 십수회 배명(拜命)받았지만 취임하지 않고 서울 근교의 장위산에 은거하면서 ‘장위산인’이라 자호하였다. 한일합방 후 일본 정부에서 남작을 수여하였으나 거절하고 서화와 거문고, 바둑으로 자오(自娛)하며 두문불출, 세사를 멀리하였다.
글씨는 해서·행서를 많이 썼으며 그림은 난과 대를 잘 그렸다. 금석문으로 과천의 <「문간공한장석신도비(文簡公韓章錫神道碑)」와 광주(廣州)의 「선성군무생이공신도비(宣城君茂生李公神道碑)」가 있으며, 전라남도 순천 선암사 입구의 강선루(降仙樓) 현판 등을 남겼다.
한편, 그림으로는 「죽도(竹圖)」(개인소장)와 「묵죽(墨竹)」(간송미술관 소장) 등이 있다. 한국서예백년전에 출품된 행서 작품을 보면 특징있는 자기의 필치는 이루었으나, 강약의 변화를 구하는 데 있어서는 무리가 있어 부자연스럽고 행의(行意)의 수필처(收筆處)의 획들에도 군더더기가 생긴 곳이 많아 격이 높지는 못하다.
석촌 윤용구(石村, 石邨 尹用求·1853∼1937) 는 문신·서화가로 본관은 해평(海平)이다. 남녕위 의선(宜善)의 아들이며, 두수(斗壽)의 10 대손이다. 자는 주빈(周賓), 호는 석촌(石村)· 해관(海觀)· 수간(睡幹)· 장위산인(獐位山人)이다. 그는 15세에 돈령부(敦寧府) 직장을 지내고, 19세에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했다. 그는 후에 규장각에 들어가 상대(常帶), 한림(翰林), 대교(待敎), 직각(直閣), 사인부제학(舍人副提學), 이조참의(吏曹參議), 대사성, 도승지, 예조·이조판서를 역임했다.   1895년 을미사변 이후로 법부·탁지부·내무부 등에 수차 배명(拜命)받았지만 취임하지 않고 서울 근교의 장위산에서 ‘장위산인’이라 자호하고 은거하였다. 한일합방 후 일본 정부에서 남작을 수여하였으나 거절하고 서화와 거문고, 바둑으로 자오(自誤)하며 두문불출, 세사를 멀리하였다.   석촌은 글씨와 그림에 두루 능했으며 그 중에서도 특히 난죽(蘭竹)과 구양순(歐陽詢) 풍의 해서, 수경(瘦勁:가늘면서 힘찬)한 행서, 그리고 금석문(金石文)을 즐겨 썼다. 금석문으로 과천의 〈문간공한장석신도비 文簡公韓章錫神道碑〉와 광주(廣州)의 〈선성군무생이공신도비 宣城君茂生李公神道碑〉가 있으며, 전라남도 선암사 입구의 강선루(降仙樓) 현판 등을 남겼다.   

이제 정사긔람의 서두에 쓴 해제로 유명한 윤백영 여사를 알아보자. 그는 본서 정사기람을 해제하여 친필로 쓴 것으로 유명하지만 실은 아버지는 위에서 설명한 윤용구(尹容求)이다.
윤백영(尹伯榮, 1888년 - 1986년). 순조(純祖)의 3녀 덕온공주(德溫公主)의 영손녀(令孫女)이다. 기억력이 좋고 박식(博識)하여 나이 80세 까지도 창경궁의 장서각(藏書閣)에 소장된 고서(古書)를 열람하러 다닌 경력이 풍부하였다.  윤백영 여사를 궁중에서는 '저동궁(苧洞宮) 할머니'라고 불렀는데 그것은 옛날 윤여사의 친정인 공주궁(公主宮)의 이름이었다. 저동궁은 후일 이완용(李完用)에게 몰수를 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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